1904~1944
이육사기자

1930년 이육사(李陸史)는 첫 시 <말(馬)>을 조선일보에 발표했다. 1월 3일자 7면 하단에 1단으로 실린 10행의 짧은 시에서 그는 “채찍에 지친 말”이지만 새해에는 힘차게 소리칠 것을 다짐하고 있다. 이육사와 조선일보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 시를 발표한 후 중외일보 대구지국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한 이육사는 1931년 8월 조선일보 대구지국으로 자리를 옮긴다. 당시 신문사 지국은 지방 취재본부의 역할을 겸했다. 이육사가 대구지국 기자로 조선일보 지면에 쓴 첫 기명 기사는 <대구의 자랑 약령시(藥令市)의 유래>이다. 1932년 1월 14일부터 네 차례에 걸쳐 쓴 이 기사에서 그는 ‘육사생(肉瀉生)’이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그는 스포츠 기사를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기도 했다. 1932년 3월 6일과 9일자 ‘스포츠난’에 2회에 걸쳐 <대구 ‘장’ 연구회 창립을 보고서>라는 기사를 썼다. 이때는 ‘이활(李活)’이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그는 “오랫동안 우리 조상으로부터 그들의 자손인 우리들에게 전하여 온 국기(國伎)인 ‘장’을 소개했다. 장이란 ‘장치기’의 준말로 두 편으로 팀을 나눠 나무토막이나 공을 긴 막대기로 쳐 상대편의 문 안에 넣는 놀이다. 이육사는 이 놀이가 ”경기에 계산하는 용어까지도 순 조선 말로 한다“면서 ”세계의 농민대중에게 보급시키라“고 주문했다. 이육사가 다시 조선일보 기자가 된 것은 1934년 무렵이었다. 이육사는 이후에도 조선일보에 꾸준히 글을 썼다. 그의 글은 1930년대 후반부터 폐간 직전인 1940년까지 조선일보 지면에 발표됐다. 5회에 걸쳐 쓴 <노신(魯迅) 추도문>(1936년 10월 23~29일자)을 비롯하여 <문외한의 수첩>(1937년 8월 3~6일자, 3회), <황엽전>(1937년 10월 31일~11월 5일자, 4회), <전조기>(1938년 3월 2일자), <계절의 오행>(1940년 4월 27일자)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