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
이석주일특파원

“조선일보만 만세를 불렀다고 지대로 쓴 겨!" 영화 「박열」(2017)에는 왕세자 폭살 모의 혐의로 붙잡힌 독립운동가 박열(朴烈)을 보도한 당시 신문기사를 보고 박열의 동지들이 흥분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일본 신문들은 “박열이 일본 재판장에게 욕설을 퍼부었다”고 왜곡 보도했다. 반면 1926년 3월 26일자 조선일보는 사형 선고를 받은 박열이 “판결을 듣고서 돌연 만세를 고창(高唱)했다”고 당당한 모습을 그대로 전했다. 조선일보에는 1930년까지 박열 관련 소식이 70여 차례 실렸다. 박열 사건을 보도한 사람은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 생활을 하다 동경 유학을 떠난 이석이었다. 당시 일본 도쿄에서 박열 공판을 취재했던 이석 특파원은 1926년 3월 4일자 조선일보 기사에서 “특별 방청석에 동포라고는 본사 특파원 하나 뿐”이라며 “박열은 장내를 돌아보다가 묵묵히 목례를 보내” 동포애를 나타냈다고 보도했다. 이석은 이전부터 일제의 잔학한 탄압 현장 르포 기사를 썼다. 1924년 8월 평북 위원군 화창면 산골 마을 화재로 주민 28명이 불에 타 숨졌다. 진상을 취재하기 위해 현장에 간 이석(본명 이봉수)은 이들이 한 독립단에 밥을 지어 먹였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의해 보복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같은 해 11월 황해도 재령군 북율면에서 소작쟁의가 일어났을 때 이석은 「총봉(銃棒)의 위협 하에 혈전하는 북율소작인」과 같은 기사를 써 일제의 조선인 수탈을 격렬히 비판했다. 사회주의자였던 이석은 1926년 8월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렀고, 출옥 후 신간회에 관여했다. 광복 후엔 초대 경주군수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