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9~1944
한용운시인·소설가

한용운(韓龍雲)은 소설가이기도 하다. 그는 1935년 4월 9일부터 1936년 2월 1일까지 모두 241회에 걸쳐 장편소설 <흑풍(黑風)>을 조선일보에 연재하며 소설가로 데뷔했다. 조선일보는 1935년 4월 2일자 <흑풍> 연재 예고에서 “《님의 침묵》이란 시집으로써 이미 시인으로서의 선생을 대하였거니와 금번 이 흑풍으로써 다시 소설가로서의 선생을 대하게 됩니다”라며 “선생의 소설은 다른 소설과 류가 다릅니다. 좀 더 다른 의미로 읽어 주시기를 바랍니다”라는 주문을 달았다. <흑풍>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신문 발행부수가 6000부 늘었고, 이 소설을 읽기 위해 조선일보를 본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이어 1938년 5월 18일부터 <박명(薄命)>이 학예면에 연재됐다. 한용운은 이 밖에도 소설 <죽음> <철혈미인> <후회>를 썼지만 <죽음>은 발표하지 않았고 <후회>는 조선중앙일보에서 연재하다 이 신문이 1936년 폐간됨에 따라 50회로 중단됐다. <철혈미인> 역시 미발표 미완성 소설이었다. 결국 한용운이 생전에 발표해 완성한 소설은 조선일보에 연재한 <흑풍> <박명> 2편뿐이었다. 한용운이 조선일보 지면을 빛낸 것은 소설만이 아니었다. 그는 논설 <조선청년에게>, 기행문 <명사십리행>, 연작시 <심우장 산시>, 수필 <심우장 만필> 등 거의 모든 장르의 글을 조선일보에 기고했다. 조선일보 태평로사옥 낙성을 축하하며 “조선 사람의 문화 정도가 진보된 상징”(조선일보 1935년 7월 6일자)이라는 글을 쓰기도 했다. 이처럼 그가 조선일보와 깊은 인연을 맺은 것은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와의 친분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언제부터 교류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1927년 신간회 중앙위원 겸 경성지회장을 맡은 한용운은 역시 신간회 중앙위원 겸 평양지회장 조만식의 소개를 통해 방응모를 알게 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1930년대 후반 한용운은 방응모의 죽첨정(현 충정로) 집에서 조만식, 홍명희와 함께 어울렸다. 일제의 호적조차 거부하며 빈한(貧寒)한 삶을 산 한용운에게 거처를 마련해 준 이도 방응모였다. 다섯 살 위의 한용운을 선생님이라 부른 방응모는 1933년 벽산 스님과 박광 등 한용운의 지인들과 함께 성북동 뒷산에 ‘심우장(尋牛莊)’을 지어 주었다. 건축비의 대부분은 방응모에게서 나왔다고 한다. 이때 한용운은 “총독부와 마주하기 싫으니 집을 북향으로 지어 달라”고 주문했다. 한용운과 방응모는 심우장에서 바둑을 두며 시국을 걱정했고 홍명희와 셋이서 배천온천에 다녀올 정도로 절친했다. 한용운은 방응모의 회갑을 축하하는 한시를 써 그에 대한 애정을 나타내기도 했다. 1944년 봄 방응모는 인삼과 녹용이 든 한약을 세 차례 지어 보내기도 했지만 한용운은 이 해 6월, 향년 66세로 심우장에서 타계했다.

기사 발자취
  1. 1935-04-18
  2. 1935-04-19
  3. 1935-04-20
  4. 1935-04-21
  5. 1935-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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