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1986
선우휘편집국장·주필

1973년 8월, 일본에 사실상 망명 중이던 야당 대선후보 김대중이 납치됐다. 한 달이 되도록 수사는 겉돌았으나, 누구도 관련된 얘기를 꺼내기 어려울 만큼 사회 분위기는 살벌했다. 1973년 9월 6일 자정을 넘긴 시각, 주필 선우휘가 편집국에 나타났다. 그는 “어떤 위협에도 개의치 않고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주필로서의 판단에 따라 책임지고 행동하겠다”고 선언한 뒤 윤전기를 세우고 사설을 갈아 끼울 것을 요청했다. 권력 최고위층의 결단을 촉구하는 ‘당국에 바라는 우리의 충정(衷情)―결단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제하의 사설이 지방판부터 윤전기에 걸렸다. 다음날 아침 세상은 발칵 뒤집혔다. 평북 정주에서 태어난 그는 일제시기 경성사범 본과에 수석 입학했다. 광복 후 월남한 뒤 조선일보 입사했으나, 채 1년이 안 돼 사표를 내고 정훈장교로 입대해 1957년 대령으로 예편했다. 1955년 소설가로 등단, 1957년 소설 「불꽃」으로 동인문학상을 받았다. 1961년 5월 논설위원으로 조선일보에 재입사했다. 출근길에 5·16쿠데타 소식을 듣고 육군본부로 가서 호통을 쳤다가, 최석채와 함께 1년여 사원명부에도 없는 ‘유령 논설위원’ 생활을 했다. 1963년과 1968년 두 번 편집국장을 역임하며 ‘6·3사태’와 ‘언론윤리위법 파동’을 최선봉에서 겪었다.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 때는 고관대작들이 제 한 몸 숨기기에 급급했던 것을 꾸짖은 시론 ‘단상에 인영이 불견’을 썼다. 1971년 12월부터 1980년까지 주필로, 그 후 논설고문으로 1986년 2월 정년퇴직 때까지 ‘선우휘 칼럼’을 썼다. 글에 작가적 감성이 살아있어 중산층 지식인 독자들의 공감을 얻었다. 직설적인 글로 논란도 많아 스스로 ‘가장 욕 많이 먹은 언론인으로 기네스북 감’이라 평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