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4월 19일, 서울 태평로에 가득찬 군중의 함성이 들려오는 조선일보 편집국도 흥분에 휩싸였다. 아랑곳없이 미동도 않은 채 한참 눈을 감고 있던 편집국장 송지영이 붓에 먹을 듬뿍 찍어 일필휘지했다. “학해(學海)에 해일(海溢)! 노호(怒號)는 암벽(岩壁)에서 포효(咆哮)!” 4·19혁명 현장을 한 줄로 풀어낸 역사적 명제목이었다.
평북 박천에서 태어나 독학으로 사서오경과 주역 등 한학에 일가를 이뤘다. 1937년 독자 투고글로 동아일보에 발탁돼 만주특파원 등을 지냈고, 임시정부 공작원으로 활동하다 나카사키 형무소에 갇혔다. 수감 중일 때 원자폭탄이 투하됐으나 구사일생으로 화를 면했다. 광복 후 여러 신문을 거쳐 1958년 조선일보 논설위원으로 입사, 1년 여 만에 편집국장이 됐다. 감격 넘치는 조선일보의 4·19 지면은 그의 지휘 아래 만들어졌다.
5·16 직후 ‘민족일보 사건’에 연루돼 사형을 선고받고 8년 여 옥고를 치렀다. 출소 뒤인 1969년 10월 논설위원으로 재입사, 1970년부터 3년간 무협소설 「천풍」을 연재해 큰 인기를 끌었다. 취하면 당시(唐詩)를 읊고 고담(古談)을 인용하는 소문난 풍류객이기도 했다. 아호 ‘우인(雨人)’은 ‘비를 부르고 비를 맞는 나그네’라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