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조선일보 문인기자 시대를 화려하게 연 사람은 김기림(金起林)이었다. 김기림의 선배 문인이자 기자였던 염상섭은 기자와 작가는 양립하기 어려운 것이라 생각했다. 기자들의 글쓰기란 기능적인 것이고 순수함이 거세된 글쓰기로 이해되는 측면이 강했기 때문이다.
김기림은 시대가 필요로 하는 기자상에 적합한 품격을 갖춘 인물이었다. 김기림은 서양 문예에 대한 깊고 폭넓은 시각으로 모더니즘 시론이나 문학이론, 비평, 수필, 시 등을 발표하면서 학예면의 중요한 필진이 됐다. 시인이자 수필가, 시론가로 김기림이 이름을 얻게 된 데에는 조선일보에 실린 그의 글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일제 말기로 접어들면서 김기림을 비롯한 문인기자들은 일상적인 차원에서조차 조선어를 말할 수 없는 상황에 부딪혔다. 1940년 8월 10일 조선일보가 폐간되자 김기림은 경성에서의 모든 것을 접고 함북 경성중학에서 영어와 수학을 가르쳤다.
광복이 되자 김기림은 서울로 돌아와 임화가 주도해서 조직한 좌파 문학단체 문학가동맹에 가입해 시부(詩部) 위원장을 맡아 해방 공간의 여느 지식인들처럼 정치적인 삶에 뛰어들었다. 그는 좌익 통신사인 공립통신의 편집국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6·25가 터지자 좌파 문학활동과의 끈질긴 인연은 결국 그의 납북으로 이어졌다. 납북 이후 그의 행적은 묘연하다. 남한에서 1988년 월북 문인 해금조치가 단행되었을 때 김기림도 해금됐다. 그가 조선일보에 발표한 수많은 시, 수필, 시론 등도 그때서야 자유롭게 읽힐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