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4년 10월 동경 일본여대 졸업장을 포기하고 조선일보에 입사한 최은희는 금세 조선일보의 스타기자가 됐다. 이름과 얼굴을 알리게 된 계기는 ‘변장 탐방’ 출동이었다. 그가 출동하던 날 조선일보는 “이번에는 특별히 부인 기자가 신출귀몰한 변장으로 대담히 출동하기로 하였습니다”하고 독자의 흥미를 유도했다. 이날 아침 수표동 조선일보 사옥 앞은 그의 얼굴을 미리 보아 두기 위해 몰려든 남자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그는 ‘땟국물이 시커먼’ 행랑어멈의 옷을 빌려 입고 서대문으로 출동했다. 한살배기 아기를 들쳐 업고 무청까지 한아름 안은 채였다. 그는 무교동, 광화문, 청진동, 종로 등을 거쳐 끝까지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고 신문사로 돌아왔다. 신문사 앞에 진을 치고 있던 사람들은 “설마 저렇게 차렸을 줄이야 누가 알았담” “나도 어린애 업은 사람을 퍽 주의해 보았지만 저렇게 반거지 같은 사람은 안 보았지”라며 탄식했다.
그는 남자기자도 취재하기 힘든 매음굴, 거지굴 등을 누비고 다니기도 했다. 최은희가 하는 일은 거의 모두 여성 최초의 일이 되었다. 1924년 12월 조선일보가 주최한 무선전화 공개방송에서 사회를 보면서 여성으로서는 물론 조선인으로는 처음으로 라디오 전파에 목소리를 실었다. 1927년 12월에는 남자기자들을 제치고 처음 조선일보 비행사 신용인(신용욱의 개명 전 이름)의 비행기에 동승한 뒤 5회에 걸쳐 탑승기를 썼다.
광복 후 최은희는 사회활동을 재개했다. 1945년 9월 여권운동자클럽을 조직하고 1946년 5월 서울보건부인회 부회장을 맡았다. 투병 중이던 1983년 5월, 5000만원을 조선일보에 기탁한 최은희는 “한평생 언론 창달을 염원하고 기여하고자 한 꿈과 뜻이 길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충정”이라고 말했다. 조선일보는 그의 기탁금을 바탕으로 ‘최은희 여기자상’을 제정해 1984년부터 매년 뛰어난 활동을 한 여기자에게 이 상을 수여하고 있다.